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파시즘 (문단 편집) === 영미학계의 반박: 프랑스 파시즘은 있다 === 1960년대 서독과 미국 학계에서 프랑스 학파의 주장을 비판한 바가 있었으나 큰 반향은 없었다. 그러던 중 [[비시 프랑스]]의 권위자인 로버트 팩스턴이 비시 프랑스는 나치의 괴뢰정권이 아니라 혁명 이전의 체제로 돌아가려는 반공화주의세력의 반란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비시 프랑스>가 프랑스에 번역, 출간되고 로베르 포리송이 프랑스가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었다. 여기에 이스라엘 역사학자 스테른헬이 프랑스파의 연구에 이의를 제기하며 프랑스를 전형적인 파시즘의 요람이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스테른헬은 <혁명적 우파, 1885~1914: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프랑스적 기원>,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프랑스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탄생> 등을 저술하면서 프랑스와 파시즘이 무관하다는 프랑스 학파의 주장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프랑스 학계는 이에 대해 격렬히 반발했다. 학자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음은 물론이고 그때까지 살아있다가 파시스트로 지목된 인물들은 스테른헬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너무 흥분했던 [[레몽 아롱]]은 1983년에 법정에서 스테른헬의 저서가 가장 비역사적인 책이라고 비판하다가 진술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등'''(...) 프랑스는 벌집을 쑤셔놓은 꼴이 되었다. 여기에 [[프랑수아 미테랑]] 등 프랑스의 거물 정치가들이 파시즘 협력 의혹을 받으면서 프랑스 파시즘 논쟁은 프랑스의 정치 현안으로 불거졌다. 스테른헬의 주장은 영국 역사학자 케빈 패스모어, 미국 역사학자 로버트 수시, 캐나다 역사학자 윌리엄 어빈의 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이 개입하면서 또 논란이 일어났다. 스테른헬은 파시즘을 혁명적 좌파현상으로 규정했으나 패스모어나 수시, 어빈 등은 파시즘을 우파현상으로 규정하여 프랑스 30년대 우파동맹들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프랑수아 드 라 로크]]의 불의 십자가단을 파시스트로 지목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테른헬은 라 로크에 대해서는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분석했다.] 이들은 프랑스 학파가 보수파로 평가한 라 로크에 주목하여 라 로크를 파시스트로 규정하여 프랑스 학파의 논지를 붕괴시키려 했다. 여기서 수시는 <프랑스 파시즘:제1의 물결>, <프랑스 파시즘:제2의 물결>등을 내놓으며 프랑스 파시즘의 보수적 성격을 지적하며 라 로크의 급진주의를 외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지만 패스모어는 수시와 어빈의 주장에 대해 이들이 라 로크의 급진주의를 무시하거나 왜곡했다고 반박하며 프랑스 학파와 수시, 어빈을 동시에 까버렸다.(...) 어쨌거나 이들 학자들의 노력으로 프랑스에서 분명히 프랑스 고유의 성질을 가진 파시즘 운동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게 되었고 또한 프랑스 보수주의를 19세기에 형성된 부르봉파,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로 도식화하는 프랑스 학파의 기존 연구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형성된 혁명적 우파의 등장이 입증됨에 따라 폐기되면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맞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